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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 유한한 삶이기에 더 소중한 가족의 사랑

by 쏭박스 2022.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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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

가족의 규칙과 개인의 꿈 사이

영화 <코코>는 '망자의 날' 동안 펼쳐지는 한 소년과 그 가족의 해프닝을 다뤘습니다. 망자의 날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멕시코의 주요 기념일 중 하나입니다. 매년 11월 첫 번째 날과 두 번째 날에 치러지는 이날에 멕시코인들은 죽은 친지나 친구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명복을 빕니다. 

어린 미구엘의 가족들은 모든 일상을 함께합니다. 함께 살고 일합니다. 미구엘의 고조할머니인 이멜다 할머니로부터 이어지는 가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멜다 할머니는 남편이 음악을 한다고 가족을 떠난 이후로 어린 딸 코코를 키우기 위해 자신에게도 소중했던 음악을 완전히 버리고 생업에 매진합니다. 그렇게 가업을 일궈냈습니다. 그래서 미구엘의 집에서는 더더욱 가족 우선주의 가치관을 강요하고 가족은 늘 함께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미구엘은 음악을 싫어하는 가족들의 눈을 피해 숨어서 음악을 듣고 연주하며 뮤지션의 꿈을 키웁니다. 

멕시코뿐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자신의 뿌리를 어떤 방식으로든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시작, 정체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혈통, 가문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피에 흐르는 역사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다시금 힘을 내기도 합니다. 그것이 가족, 함께의 힘입니다. 하지만 주객이 전도되어 가문과 가족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도록 강요하는 악습이 남아 있습니다. 

미구엘이 죽은 자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을 대, 가족의 축복을 받아야 원래 세계로 갈 수 있는 상황에서 코코의 조상들은 조건부 축복을 내려줍니다. 절대 음악을 하지 않을 것. 하지만 미구엘은 산 자의 세계에 돌아가자마자 그 약속을 어겼고, 다시 죽은 자의 세계로 소환됩니다. 잘못하면 죽은 자의 세게에 후손이 갇힐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미구엘의 조상들은 가족의 규칙을 들이댑니다. 

결구 우여곡절 끝에 미구엘은 가족들의 무조건적인 축복을 받고 원래 세상으로 돌아옵니다. 영화는 결말을 통해 가족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희미하게나마 전합니다. 가족은 소중하지만 '따로 또 같이'가 가능해야 하며, 그래야 건강한 관계가 유지됩니다. 

메멘토 모리

망자의 날 밤이 되면, 죽은 자들은 마리골드를 밟으며 산 자의 세계로 건너옵니다. 두 세계를 잇는 다리 아래로 마리골드가 폭포처럼 흘러내립니다. 마치 모래 세계의 남은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우리의 시간도 유한하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연결하는 핏줄 같기도 합니다. 마리골드의 꽃말은 '비탄, 실망, 비애, 슬픔'이며,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기도 합니다. 다른 꽃말에 비해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은 혼자만 너무 동떨어져 보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삶이 너무 고달프다면? '죽음'을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망자의 날'에 집으로 오는 길과 집 안 곳곳을 마리골드로 장식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철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현실이 고달플수록 내세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언젠가 반드시 올 행복, 미래를 그리며 현재를 견디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의 명복을 빌며 알록달록 화려하게 꾸미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먼 옛날, 힘든 현실을 견디기 위한 멕시코인들의 지혜였는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 죽음의 의미

조상들의 조건부 축복을 받고 싶지 않았던 미구엘은 자신에게 조건 없는 축복을 내려줄 수 있는 또 다른 조상을 찾습니다. 바로 전설적인 뮤지션인 에르네스토였습니다. 그는 자기 고조할아버지라고 생각한 코코는 죽은자들의 세게에서 에르네스토를 찾아 헤매던 중, 우연히 헥터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고 함께 헥터가 사는 동네에 들릅니다. 그곳은 가족이 없는 죽은 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습니다. 헥터가 안내한 작은 집에는 헥터의 친구가 힘없이 누워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 인사를 남겼고 곧 몸이 투명하게 변하더니 영영 사라졌습니다. 이미 죽은 자였지만 이제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조차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코코>의 세계관에서는 살아있는 사람 중에서 아무도 기억해주는 이가 없으면 죽은 자들의 세게에서도 그 존재가 사라직 됩니다. '두 번째 죽음'인 셈입니다. 만약 어떤 죽은 자를 기억하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많다면, 그는 죽은 자의 세상에서 부유하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살았을 때의 부와 명성을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도 이어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 죽음의 개념은 우리에게 죽음의 의미를 다시 묻습니다. 산 자의 세게에서 죽음은 아주 멀리 있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죽은 자의 세계에서 죽음은 가까이에 있습니다. 이미 한 번 죽은 이들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산 자의 세계에서 기억해주는 이가 한 명도 남지 않게 되면 죽은 자의 세게에서도 그 존재가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 공포는 죽어 있는 내내 지속됩니다. 어쩌면 <코코>는 우리에게 죽은 후에도 오래도록 기억될 만큼 소중한 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유한한 시간

우리는 무의식중에 당연히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때때로 정말 중요한 것을 다음으로 미루곤 합니다. 살면서 죽음을 한 번이라도 만나본 사람은 시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놓여 있을 때,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면 이전과 같은 결정을 할 수 있을까요? 뮤지션이 되기 위해 가족의 곁을 떠났던 헥터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았다면, 그는 결코 그렇게 가족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성공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원하는 만큼의 시간을 허락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매 순간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유한한 시간을 살고 있다는 자각, 죽음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다는 의식은 필요합니다. 그건 현재를 더 의미 있고 소중한 것들로 채워나가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고 가정해도 이 선택을 할 것인지를 자문한다면 자존심 혹은 욕심으로 덮여있던 눈앞에 환해질 것입니다. 시간의 유한성과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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