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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생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by 쏭박스 2022.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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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유혹을 피하려면

모스크바의 한 무도회장. 오빠 내외의 부부 싸움을 중재하러 온 안나 카레니나는 사돈처녀 키티의 데뷔 파티에 참석했습니다. 안나는 그곳에서 백 작가의 청년 장교 브론스키와 처음 만났습니다. 안나는 이미 결혼해 여덟 살 난 아들까지 있는 몸이었지만 브론스키와 서로 강렬한 끌림을 느낍니다. 안 나와 브론스키는 핀란드 춤곡인 마주르카를 추면서 무아지경에 빠집니다. 시간을 멈춘 듯 서로만 보이고 걷잡을 수 없이 서로를 탐합니다. 훗날 브론스키에서 처음 육체적 관계를 맺게 되는 순간보다 더 격렬합니다. 서로에 대한 감정이 자신들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바람에 키티를 포함한 무도회장에 있던 사람들도 그들의 감정을 알게 됩니다. 

황급히 춤을 멈추고 달려 나가 거울앞에 선 안나의 뒤로 기차가 달려오고 있습니다. 안나의 환영입니다. 앞이 아닌 뒤에서 달려오는 기차는 마치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처럼 피할 수 없는 숙며을 의미하는 듯합니다. 안나는 브론스키와 부적절한 관계를 시작하면서 늘 달려오는 기차에 쫓기는 기분을 느낍니다.  행복해서 죽을 것 같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합니다. 영화 곳곳에 깔린 복선이 둘의 끝이 어떨지를 보여줍니다. 때때로 안나에게 불안이 엄습해올 때면 죽은 노동자가 기차 바퀴를 두드리던 소리가 환청으로 들립니다. 

질주하는 기차 같은 감정은 이미 배우자가 있다고 해서 피해 가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감정을 자각한 이후의 행동 양상은 사람마다 제각각입니다. 사랑을 나누는 방식에는 육체적 사랑만 있지 않으며, 악은 사람의 가장 약한 틈을 너무도 정교하게 공격합니다. 누군가는 그 유혹에 넘어가고 누군가는 피하며, 누군가는 유혹에 잠시 넘어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이전과 모든 게 같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외로움을 채우려면

정확하고 온기가 없는 시계, 이는 안나가 남편 카레닌을 보는 시선입니다. 브론스키를 만나기 전까지 안나는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삶에 만족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거의 스무 살 차이가 나는 카레닌은 다정하지는 않지만 가정에 충실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최고의 정치가인 카레닌은 무뚝뚝했고 늘 일이 우선이었습니다. 어린 아들 세료자가 아침마다 아빠를 찾아오지만, 그는 바빠서 공부를 봐줄 수 없다며 매번 청을 물렸습니다. 고위 관료인 카레닌은 일이 늘 많았고, 안나는 일상에 지루함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결핍의 이유를 배우자에게 돌릴 수만은 없습니다. 처한 상황이 같다고 누구나 동일한 선택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결핍을 채울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지 못한 안나가 안타깝습니다. 

풍요로운 집에서 늘 외로운 사람이 안나 말고도 또 있습니다. 혼자서 엄마인 안나를 기다리는 아이, 세료자. 집 안에는 언제나 사람이 붐비고 유모와 함께 있지만 세료자는 혼자인 것만 같습니다. 어둡고 텅 비어있는 세료자의 방은 아빠에게 인정받고 싶고 엄마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여덟 살 아이 세료자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카레닌이 안나와 브론스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아냐를 거두어 세료자와 함께 있게 하는 모습에서 조금은 해피엔딩 같은 기분이 듭니다. 아냐를 안은 세료자는 웃습니다. 세료자는 엄마를 잃었지만 새로운 가족과 아버지의 관심 덕분에 더 이상 외롭지 않은 듯합니다. 

공허하고 텅 빈 마음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요? 외로운 사람이 타인의 애정을 갈구하는 것은 목마른 사람이 사막에서 신기루를 보고 달려가는 행위와 같습니다. 오아시스인 줄 알고 달려간 곳은 여전히 사막입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으려면 제대로 된 지도와 나침반이 필요합니다. 진짜 나의 마음이 향하는 곳, 허상이 아닌 진실의 거울에 비출 수 있는 마음으로 물어야 합니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안나와 브론스키, 둘의 관계는 더 적극적이고 과감해집니다. 사교계에서 귀부인과 젊은 장교 사이의 스캔들은 이미 만연하지만 쿨한 관계여야 트렌드에 맞습니다. 비공식적으로는 무엇을 해도 괜찮지만 그 관계에 목맬 정도로 진심이면 안됩니다. 그것은 사교계의 룰을 어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불륜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진심인 것을 비난하는 사회입니다. 그들 비난의 화살은 주로 브론스키가 아닌 안나를 향합니다. 안나와 브론스키를 감싸고 두둔하려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귀족들의 이중적인 사생활과 위선적은 또 어떻습니까. 자신들이 조소하는 대상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손가락질하고 더럽다며 조리돌리는 꼴이 우습고 비겁합니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지금의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그것을 감당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안나의 사랑에는 믿음이 결여되었습니다. 믿음은 믿을 만해서 믿는게 아니라, 그 어떤 상황에서도 믿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안나는 사랑을 선택했으나 책임지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상대를 벌주고 신을 대신해 자신을 스스로 심판했으며, 관계를 마무리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심판자는 누구인가

안나는 브론스키에게 천눈에 반했던 감정도, 시간이 지나 변해버린 자기감정의 책임도 브론스키에게 돌립니다. 처음에는 사랑을 알게 해준 브론스키에게 고마웠지만, 결국 브론스키가 변했다고 생각해서 조절하고 원망합니다. 결국 안나의 행복은 브론스키라는 외부의 말에 좌지우지됩니다. 그의 표정과 말, 행동에 따라 이리저리 감정이 요동칩니다. 브론스키를 향한 안나의 사랑은 불같이 강렬하고 뜨거웠지만 견고하진 않았습니다. '사랑받고 있다'고 기쁘게 차오르는 만족감은 있었으나 '사랑한다'라는 동사는 없었습니다. 그를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다짐도 어려운데, 타인이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고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은 얼마나 불완전한 욕망입니까. 인생은 마주르카가 아닙니다. 음악이 멈추면 마주르카는 끝나지만 삶은 계속됩니다. 정신을 잃을 만큼 상대방과 교감하는 마주르카처럼 24시간 365일을 살 수는 없습니다. 

브론스키의 집에서 지내며 점점 무너지는 안나의 마음에 색이 있다면, 푸른 와인에 모르핀을 탄 것과 같은 색일 것입니다. 브론스키의 집 안을 비출 때의 색감과 비슷합니다. 영화 내내 우리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안나를 지켜봅니다. 불쌍하다거나 안쓰럽다기보다는 '안타깝다'는 표현이 맞을 것입니다. 

안나가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고자 했다면 스스로 죽음으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했습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은 것에 용서를 구하고 스스로를 돌봐야 했습니다. 브론스키를 벌하기 위해 자신의 목습을 버리는 선택이 아니라 말입니다. 결국 안나는 신에게 용서를 구하지만, 자신의 죽음으로 브론스키에게 괴로움을 주기 위한 가해를 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안나의 또 다른 잘못은 스스로가 심판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은 안나에게 죽음으로 죗값을 치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안나를 향한 이 안타까움은 사실 그 시대를 향한 분노이기도 합니다. 어리석은 결정을 하고 죽은 한 여인에 대한 안쓰러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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