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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삶에서 가장 참된 것

by 쏭박스 2022.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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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름의 진짜 의미, 본질

모험을 떠나는 성장형 애니메이션에서는 주인공 신분이 공주나 왕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센과 차히로의 행방불명>의 주인공 치히로는 평범한 열 살짜리 여자아이입니다. 치히로는 이상한 세상에 우연히 들어가 겪는 모험 중에 시기, 질투, 왜곡된 시선, 사랑, 우정과 같은 것들을 경험합니다. 가볍게 볼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인생의 중요한 의미들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본질을 지켜내고 회복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 어떻게 지킬 수 있는지, 서로에게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관객의 시선은 보통 영화 주인공의 감정을 따라가지만, 늘 그렇지는 않습니다. 각자 현재 처한 상황이나 집중하고 있는 이슈, 역할에 따라 주인공이 아닌 다른 인물에게 공감하고 감정 이입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는 꽤 많은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자신이 어떤 장면에서 누구의 감정을 따라가는지 탐색해보면 현재의 나를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몰랐던 나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이름'입니다. 온천장의 주인인 마녀 유바바는 일하지 않는 자를 돼지로 만들어 도살하거나 굴뚝 속의 검댕으로 만들어 평생 어둠 속에서 고통받게 합니다. 살아남기 위해 유바바의 밑에서 일하게 된 치히로는 이름을 빼앗기고 '센'이라는 이름을 대신 받습니다. '치히로'라는 이름의 의미는 '천 길의 깊이', 즉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유바바가 처음에 치히로의 이름을 듣고는 "거한 이름을 가졌구나"라고 말한 것입니다. 반면 '센'은 숫자 천을 의미합니다. 의미가 담긴 이름을 지우고 숫자를 부여한 행위는 치히로를 존재가 아닌, 언제든지 무엇으로든 대체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온천장에서 일하는 수많은 역할 중 하나로 대하겠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치히로를 도와준 하쿠 역시 이름을 잃은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름으로 표현되는 '존재의 의미'를 유바바에게 빼앗긴 이들은 점점 자신을 잃어갑니다. 과거의 의미도 희미해지고 목적을 잃은 목표만 남게 됩니다. 돼지가 된 치히로의 부모님은 자신이 인간이었음을 완전히 잊었습니다. 영화 속에는 가마 할아범도 등장합니다. 가마 할아범이 치히로에게 준 편도 기차표는 그가 온천장에 올 때 사용하고 남은 표일 것입니다. 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잊고 매일 고된 일을 하는 가마 할아범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요? 그는 무엇을 잃어버렸을까요? 무엇을 위해 유바바에게 왔을까요? 가마터에서 일한다고 하여 가마 할아범으로 불리는 그의 진짜 이름은 무엇이고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요? 


우리도 가마 할아범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른이 되고 사회에서 역할을 맡아가며 진짜 이름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명함이 생기고 직책으로 불리며, 마치 그 자리가 자신이라고 믿습니다. 일을 시작할 때 가졌던 처음의 마음이 점점 희미해지다가 언젠가는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기도 합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이름으로 표현된 우리의 진짜 의미와 본질을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을지, 처음의 마음이 훼손되었다면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합니다.

 

진짜 소중한 것을 아는 지혜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얼굴 없는 요괴 가오나시에게 치히로는 예의바르게 인사하고 친절을 베풉니다.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치히로는 그에게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필요한 것 이상을 가오나시가 주려고 해도 치히로는 받지 않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는 다른 이들은 금을 준다고 해도 거부하는 치히로가 이상하기만 합니다. 욕망을 건드려 원하는 것을 주고 잡아먹는 가오나시의 전략이 치히로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치히로는 다만 친구 하쿠를 살리고, 부모님과 무사히 인간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치히로가 원하는 것을 가오나시가 줄 수 없으므로 치히로를 잡아먹을 수 없습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어른들은 욕망에 사로잡혀 진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립니다. 치히로의 부모님, 유바바, 그리고 온천장에서 일하는 이들이 그렇습니다. 소중한 것을 잃고 눈앞의 욕망만을 따르는 그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습니다. 치히로의 부모님은 눈앞의 음식에만 몰두하느라 치히로가 사라진 것도 모릅니다. 유바바는 가오나시가 만들어낸 가짜 금을 쌓아놓고는 흐뭇해하느라 하나뿐인 아들 보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가오나시가 가짜 금을 만들어내자 온천장의 직원들은 그의 환심을 사려고 아부합니다. 온천장 영업시간도 아닌데 음식을 내오고 춤을 추며 잘 보이려고 합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가오나시는 폭력적으로 돌변합니다. 얼굴 없는 요괴 가오나시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 모릅니다. 늘 외롭고 공허합니다. 끝없는 갈증을 채우려 하지만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용당하기도 하고 폭력적인 방식이 오가기도 합니다. 가오나시는 존재의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찾지 못했을 뿐입니다.  물질이 오가는 관계가 아닌 마음이 오가는 관계가 무엇인지 알게 되면, 더는 얼굴 없는 요괴 가오나시가 아닌 가면 속 자신의 진짜 얼굴을 찾을 것입니다. 


가오나시는 현대인들을 대변합니다. 많은 이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지만, 홀로 태어나 홀로 죽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근본적 외로움과 공허함을 떠안고 있습니다. 그 공허함을 무분별한 관계과 물질로 채우려 합니다.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지금, 오히려 사람들은 더 되롭습니다.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과 당장이 충동을 구분하지 못하고 타인과 건강하게 관계 맺는 방법을 모르는 가오나시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매 순간 지금 여기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그리고 나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 묻고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열심히 산다'는 말의 의미를 '비본질에 집중하는 것'으로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잘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의 눈을 가리고 존재의 진정한 의미를 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무엇을 회복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진짜 원하는 것과 충동을 구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본질에 집중하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면서 생각해봅시다. '삶에서 가장 참된 것은 만남'이라는 마르틴 부버의 말처럼, 참된 존재로서의 '나'를 잘 만나고, 소중한 존재로서의 '타인'과도 잘 만나기를, 그래서 우리가 온전한 본질로 존재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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