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야 하는 것 말고 '하고 싶어서 하는 것'
앨리는 도시에서 온 17세 소녀입니다. 가족과 함께 여름을 보내기 위해 시골 마을 시브룩에서 왔습니다. 이 마을에 사는 동갑내기 소년 노아는 목재소에서 일합니다. 둘은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급속도로 서로에게 빠져듭니다. 앨리는 밝고 순수하며 충동적입니다. 둘은 자주 다투지만, 노아는 그런 앨리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상류층 자제인 앨리는 하루 일과가 빽뺵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앨리는 노아에게 자신이 여러 대학에 원서를 넣었는데 '우리'는 그중 어떤 대학을 원한다고 말합니다. 앨리가 말하는 '우리'는 앨리 자신과 부모님입니다. 앨리는 모든 걸 부모님과 결정합니다. 부모님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 해야 해서 하는 것, 책임감으로 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혼자 사는 게 아닌 이상 우리는 의무에도 충실해야 합니다. 하지만 해야 하는 것만 하며 사는 삶은 너무나 팍팍합니다. 중요한 것을 함께 결정하는 부모님은 앨리가 정말 하고 싶은 일에는 관심이 없거나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앨리의 부모님이 앨리를 사랑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자신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습니다.
자유를 향한 갈망
17세의 앨리가 노아와 함께하며 급속도로 빠져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노아는 아버지를 존중하지만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집니다. 노아가 목재소에서 일하며 경제활동을 하는 이유를 가난해서라고 볼 수도 있지만 경제적, 정서적 독립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앨리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새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앨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 부모님에게 휘둘리는,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하는 자신에 대한 불만과 동시에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당당하고 독립적인 노아에게 솔직하고 순수한 앨리가 반한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앨리는 답답함을 느끼고 자유를 갈장하지만, 결국 순응하고 상류층의 삶을 살아갑니다. 부모님의 반대로 노아와 헤어집니다. 이후로도 앨리는 온전한 선택이 아닌 물길에 이끌리듯 부모님이 원하는 선택들을 합니다. 앨리를 찾아 시브룩에 온 약혼자 론에게 사실을 말하고 노아에게 온 그때가 바로 앨리가 처음으로 부모님의 둥지를 완전히 떠난 순간입니다. 앨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을 거스르고 타인에게 상처 주는 것을 감수하며, 자신이 진정 원하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지극히 사랑한다는 의미
영화는 시간이 흘러 노인이 된 노아의 독백으로 시작합니다. 영상에는 붉은 노을을 등지고 노를 젓는 한 사람의 모습이 나옵니다. 물살을 따라 흐르듯 몸을 맡길 수도 있지만, 원하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물살을 가르며 노를 저어야 합니다. 그 순간 우리 육체는 고단함을 견뎌야 합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힘 안들이고 물길을 따라 내려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노아가 한 사람을 지극히 사랑했던 과정은 때로는 물길을 거스르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만족할 만큼 사랑했고 사랑받았습니다. 사랑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랑한 만큼 돌려받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그림자까지도 인정하고 나의 그늘 또한 건강하게 드러낼 수 있는 관계를 말합니다. 노아의 독백은 반복되는 일상에 가라앉지 않으며 매일을 성실하게 사랑하며 살아온 한 사람의 당당한 고백입니다.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
영화 초반에 17세의 노아는 앨리에게 "원해서 하는게 뭐야?"라고 질문합니다. 그리고 7년 후, 24세의 노아는 앨리에게 "넌 뭘 원해?"라고 묻습니다. 앨리에게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은 노아가 유일합니다. 앨리는 노아 곁에 있을 때 그림을 그립니다. 앨리가 해야 하는 것 말고 원해서 하는 것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곳은 노아 곁입니다.
영화 <노트북>에는 월트 휘트먼의 시가 계속 나옵니다. 서민적이고 당당하며 스스로를 믿는 윌트 휘트먼과 노아는 닮았습니다. 어린 시절 노아의 말 더듬는 버릇을 고치기 위해 아버지가 시를 낭독시켰는데, 이후로 휘트먼의 시는 노아의 삶과 동행합니다. 노아는 육신이 둔하고 나이 들고 차가워지더라도, 작은 불씨는 때가 되면 다시 타오른다고 믿습니다. 그 불씨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지라도 말입니다. 노아는 아프다는 개념도 '닳아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속상하고 슬픈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순리라고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자포자기가 아닙니다. 지나간 것,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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